존 헤밍스(John Hemmings) 박사/국제 태평양 포럼
주권은 국제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이며 국가 관계를 이끌고 규칙 기반 질서의 기준선을 수립하는 부문에서 국력만큼이나 중요할 수 있다. 1648년 유럽은 30년 전쟁 후 베스트팔렌 조약을 체결하며 주권 국가의 개념을 확립했다. 많은 학자들은 이 조약의 체결로 현대 국제 관계의 틀도 마련됐다고 주장한다. 글로벌 질서의 기본으로서 오늘날 당연하게 여겨지는 주권 국가 개념은 베스트팔렌 조약에 의해 탄생했으며, 주권 국가란 국경 내 평화를 유지하고, 외교를 실시하고, 조약을 제정하고, 궁극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책임이 있는 주체로 해석된다.
조약 이전에 유럽 공국은 제한된 주권을 갖고 있었으며 교황으로부터 대부분의 정당성을 부여받은 통치자가 추종자들을 통치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도 태평양에서는 오랜 역사를 지닌 중국 중심의 질서가 주권을 규정했다. 학자들에 따르면 인도 태평양 국가들의 통치자들은 중국 헤게모니(중국이 하늘 아래 모든 것을 다스린다는 천하 원칙)를 받아들이는 대가로 중국의 황제가 부여한 정당성을 부여받았다. 따라서 많은 면에서 1648년 이후에 정의된 주권은 단순히 영토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명목상의 평등을 만드는 것이었다.
지속적인 관련성
보안 실무자들은 주권 개념을 일상 업무의 부수적인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주권 개념은 언뜻 보이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유엔 헌장 제1장 2조에는 유엔이 “모든 회원국의 주권적 평등을 원칙으로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러한 핵심은 인도 태평양에서도 똑같이 중요하며, 후기식민주의, 영토 분쟁, 인권 문제 등 쟁점은 그 중요성을 더욱 부각시킨다.
2022년 6월 싱가포르 샹그릴라 대화에 참석한 기시다 후미오(Kishida Fumio) 일본 총리와 로이드 오스틴(Lloyd Austin) 미국 국방부 장관을 비롯한 거의 모든 연사는 한 번 이상 주권을 언급했다. 여기서 더 나가 세바스티앙 르코르누(Sebastien Lecornu) 프랑스 국방부 장관과 판 반 장(Phan Van Giang) 베트남 국방부 장관은 주권을 각각 7번씩 언급했다. 주권 개념은 그것이 지닌 근본적인 영향 때문에도 중요하지만, 남중국해와 동중국해, 부채의 덫 외교, 중국 인도 관계, 경제 강압, 영향력 작전 등 지역 내 균열과 화약고의 배후이기도 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이러한 긴장의 핵심에는 주권뿐 아니라 질서에 대한 서로 다른 개념도 분명 존재한다. 중국의 질서에 대한 위계적인 접근법과 가장 크게 충돌하는 것은 대부분의 주권 개념에 포함된 명목상의 평등이다. 주권 같은 주제는 미국과 기타 지역 국가 간 합의된 핵심 영역을 구성하는 원칙 차원에서만 다룰 수 있다.
중국의 일대일로 계획을 알아보자. 일대일로 계획은 지난 10년 동안 전 세계 언론의 엄청난 주목을 받았으며 인프라 개발을 위해 중국 차관을 수락하라고 전 세계 국가를 부추겼다. 중국은 공공재와 개발을 제공하는 자애로운 국가 이미지를 구축하려 했지만 일대일로의 전략적 특성은 지역 전반에서 비판적인 평가를 받았다. 2017년 인도 학자 브라흐마 첼라니(Brahma Chellaney)는 많은 사람들의 우려를 반영하여 “부채의 덫 외교”라는 용어를 만들고 중국의 대규모 보조금은 해당 국가를 중국에 의존하게 만들고 친중국 노선을 채택하게 만들도록 고안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우려는 인도의 영토 주권 인식에까지 그 영향을 미쳤다.
2018년 4월 인도 외교부 대변인은 성명에서 “일대일로에 대한 인도의 입장은 아주 명확하며 변함이 없다. 주권과 영토 보존에 대한 핵심 우려를 무시하는 프로젝트는 그 어떤 나라도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라고 밝혔다.
주권 정의
베스트팔렌 조약에 따르면 주권은 영토와 내정 불간섭 원칙에 있다. 많은 나라들이 이러한 설명을 지지하지만 인도 태평양 지역에는 이와는 미묘하게 다른 세 가지 주권 정의가 있다.
전통적 또는 엄격한 주권
첫 번째는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파생된 역사적인 주권 개념으로서 인도 태평양의 많은 국가들이 가장 철저하게 준수하는 정의다. 서구 제국주의와 지역 내 분쟁의 역사를 고려하면 충분히 이해가 가능한 부분이다. 예컨대 아세안은 자신이 베스트팔렌 주권의 모델이라고 자부한다. 아세안은 헌장에 따라 불간섭 및 자기 결정 원칙을 기반으로 설립됐기 때문이다. 가령 아세안 국가들이 미얀마의 로힝야족 인도주의 위기에 연루되는 것을 꺼리는 것은 불간섭 원칙이 적용되는 범위에 대한 합의 부족에서 비롯된다. BBC에 따르면 2021년 2월 미얀마 쿠데타 직후 인도네시아는 아세안의 대응을 모색하려고 시도했으나 이를 지지한 국가는 브루나이, 말레이시아, 싱가포르뿐이었고, 캄보디아, 라오스, 필리핀, 태국, 베트남은 당시 미얀마의 상황을 내정 문제라고 봤다.
책임 있는 주권
두 번째 주권의 정의는 주로 캐나다, 미국, 다수의 서유럽 국가가 지지하는 것으로, 베스트팔렌 조약의 원 정의를 약간 변형한 것이다. 유엔은 주권 개념을 강화하여 주권이 책임이라고 주장한다. 유엔이 사회 계약 전통에서 도출한 이 정의에 따르면, 국가는 국민에게 복지를 제공해야 하며 특정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지 않으려 하거나 인권 침해의 실제 가해자인 경우 “광범위한 국가 공동체”에 그에 대한 책임이 존재한다.
서방은 미얀마의 인권 침해에 대해 아세안 국가로부터 지지를 구할 때 이러한 주권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한편, 책임 있는 주권 원칙이 2005년 9월 세계 정상 회의 유엔 총회에서 통과된 결의안에서 수용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위계적 주권
마지막으로 중국이 홍보하고 추구하고 있으나 일관성이 약간 떨어지는 변형된 정의가 있다. 중국은 한편으로 1954년에 도입된 평화 공존 5원칙 중 영토와 불간섭을 우선하고 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임의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일례로 타이완에 대해서는 청나라(1644-1911년) 때부터 영유권을 주장해왔지만 원나라(1271-1368년)가 통치했던 현재 몽골의 일부 지역에 대해서는 영유권을 주장하지 않는다. 책임 있는 주권과 관련하여 중국은 시종일관 중국 공산당의 일당 통치 개념을 주장하고 국가의 발전, 문화, 가치를 고려해야 한다며 외부 세력의 개입을 단호하게 반대하고 있다. 이에 더해 중국에는 민족 주권에 대한 개념이 있다. 예를 들어 중국은 중국 혈통의 외국 국적자에 대해 중국 공산당의 지지자 및 반대자로서 역외 주권을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중국은 유엔해양법협약 같은 주권 합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변호사 겸 미국 해군참모대학교 전략학 교수인 피터 A 더튼(Peter A. Dutton)은 2008년 2월 미국 중국 경제 및 안보 검토 위원회에서 중국이 “주권 개념을 재편하려는 욕망을 반영하는 방식”으로 권리와 사법권을 확장하려 한다고 증언했다.
공감대를 형성한 현대적 개념
미국과 아세안은 책임 있는 주권에 대해서는 이견을 보이고 있지만, 유엔해양법협약에 정의된 국가의 영토와 권리에 대해서는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중국의 팽창주의적 세계관은 아직 일관적이거나 보편적인 접근법으로 성숙되지 않았으며, 이러한 세계관은 남중국해에 대한 중국의 전략적 영유권 주장을 사후 지원하는 엉성한 시도에 가깝다. 미국과 다른 지역 국가들은 국가 평등 원칙을 받아들이는 외교와 대외 정책을 수행하고 있다. 반면, 중국은 주권 개념을 적용하는 방식에서 일관성이 떨어진다.
이러한 비일관성은 중국의 제국주의 문화와 마르크스 혁명 이데올로기에서 주로 도출된 외교 정책 문화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작은 국가의 주권이 작다고 보는 중국의 작은 나라에 대한 위계적 접근법에서는 앞서 소개한 중국 황제가 세계의 중심이라는 천하 같은 중국의 중화 정치 전통을 찾아볼 수 있다. 2010년 당시 중국 외교부 장관 양제츠(Yang Jiechi)는 외교관들에게 “중국은 대국이며, 다른 나라는 소국이다.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외교적 실언으로 기록된 이 발언은 국제 시스템에서 중국의 주권이 다른 나라의 주권보다 중요하다고 보는 위계적 주권 주장의 핵심이다.
본질적으로 전쟁에 지친 국가들이 수 세기 전에 수립한 주권의 현대적 개념은 현재 정치 질서의 기반이자 규칙 기반 사회의 기준이다. 이러한 질서는 국경과 국민에 대해 주권에 기반한 통제권을 국가에 부여하는 것은 물론 국가가 국민을 통치하는 방식에 대한 규범 역할을 한다. 또한 그 질서는 태평양 섬나라의 평등을 보장하며 국력과 중요성 면에서 이들의 큰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명목상 외교 민주주의를 추구한다. 즉, 강대국의 외교부 장관과 작은 도시 국가의 외교부 장관의 지위가 같으며 국가는 크기에 관계없이 조약에 구속된다는 것이다. 주권 개념은 인도 태평양 지역에 불협화음을 일으켰지만 인도 태평양을 하나로 묶는 끈이기도 하다. 결국 국제 외교, 법, 협약은 모두 주권 국가의 선의와 협력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