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완이 중국의 영토였던 적이 있던가?

역사적 관계는 중국이 인정하고 싶은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게리트 판 데어 위스(Gerrit van der Wees) 박사

2020년 11월 마이크 폼페이오(Mike Pompeo) 당시 미국 국무부 장관은 라디오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타이완은 중국의 일부가 아니며 레이건(Reagan) 미국 정부가 마련한 후 35년 동안 미국이 고수해온 정책에 따라 인정받았다”.
중국은 1949년 건국 이후 단 한 번도 타이완에 대해 주권을 행사한 적이 없다. 타이완은 “본토 수복”을 원했던 장제스(Chiang Kai-shek)가 타이완을 건국한 이후부터 줄곧 독립적으로 통치되었다. 1990년대 초부터 타이완은 활기찬 민주주의 국가로서 국제 사회에서 완전하고 평등한 일원으로 인정받기를 원해왔다.
특히, 1982년 7월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미국 대통령은 6대 보장을 공포한 조항에서 “타이완의 주권에 대해 미국은 입장을 변경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는 1951~52년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의 결과에 따라 타이완의 국제적 지위를 “미정”으로 간주한 미국의 입장을 언급한 것이었다.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에 따라 일본은 타이완에 대한 주권을 공식적으로 양도하게 되었으나, 양도받을 대상이 결정되지 않았다. 1951년 평화 회의에서 대부분의 국가들은 유엔 헌장에 명시된 자결 원칙에 따라 타이완의 지위를 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타이완은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에 중국의 일부였는가?
타이완 문제가 “내정” 문제이며 타이완은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부터 양도할 수 없는 중국의 일부라는 중국의 주장은 어떠한가?
1624년 타이완에 도착했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대표는 타이완에서 명나라( 1368년~ 1644년)의 행정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실제로 1622년에 현재 타이완해협에 있는 페스카도레스제도에 작은 요새를 세운 네덜란드는 명나라 황제로부터 “명나라 밖으로 나가라”는 통보를 받은 후, 당시 포르모사섬으로 불렸던 타이완으로 이동하여 38년 동안 통치하며 처음으로 행정 구조를 수립했다.
따라서 타이완은 절대 명나라의 일부가 아니었다.
청나라가 새롭게 건국된 후 1662년, 2만 5000명을 선박 400척에 태우고 푸젠 해안을 떠나온 명나라 추종자 정성공이 네덜란드 요새 젤란디아를 포위하며 네덜란드의 통치는 끝났다. 9개월 후 네덜란드는 항복했고 정성공은 타이완 남서부에 정권을 수립했다. 이후 정성공의 손자가 1683년 펑후 전투에서 청나라 군대에 항복할 때까지 21년 동안 전쟁이 지속됐다. 정성공과 그의 가족은 당시 멸망한 명나라의 일부가 아닌 독립적인 동녕왕국으로 타이완을 통치했다.
청나라 황제의 목표는 타이완을 정복하는 게 아니라 반란을 일으킨 정성공 정권을 무너트리는 것이었다. 1683년 청나라 강희제는 “타이완은 청나라 밖에 있으며 중요하지 않다”며 네덜란드에 그 땅을 사라고까지 제안했다. 아마도 이는 중국의 현 집권자들에게는 불편한 진실일 것이다.
그때부터 타이완은 200년 이상 청나라 황제가 푸젠성의 일부로 간접적으로 통치했다. 그러나 청나라 통치 기간 중 타이완에서는 100여 건의 반란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기록으로 남아있고 일부 반란은 진압하는 데 5만 명 이상의 병력이 필요했다. 타이완의 역사가들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3년마다 봉기가 일어나고 5년마다 반란이 일어났다.” 타이완 주민들은 청나라를 외국 식민지 정권으로 간주했고 중국의 일부가 되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1887년 청나라 말기에 베이징의 통치자들은 타이완의 지위를 푸젠성 관할 구역에서 중국의 공식 성으로 격상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의 주 목적은 타이완에 식민지를 설립하려는 프랑스와 일본의 시도를 막기 위한 것이었지만 청나라에서 순무(governor)로 임명한 류명전은 타이완을 발전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전기를 도입하고, 지룽에서 남부까지 철도를 건설하고, 전신 케이블 네트워크를 설치했다. 그러나 근대화는 8년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타이완 민주국
다음 이야기는 더욱 흥미진진하다. 1894~95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청나라는 시모노세키 조약에 따라 타이완을 일본에 영구히 할양하기로 합의했다. 당경숭 순무를 비롯한 타이완 지배층은 토착 세력과 협력하여 타이완 민주국을 선포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것을 반대했다.
일분군 세력이 압도적으로 강했기 때문에 타이완 민주국은 오래 가지 못했지만 타이완 중부와 남부에서 반군을 조직하여 강력히 저항했다. 정규군 사령관에는 10만 명을 지휘한 유명한 “검은 깃발” 유영복이 있었다.
일본의 모범적인 식민지
타이완은 1895년에 일본의 식민지가 됐고 그 후 20년 동안 호클로족과 하카족 등의 토착민들이 일본의 통치에 반대하는 많은 반란과 봉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일본은 인프라를 개선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도로, 철도, 항구, 병원, 학교를 건설했다. 1920년대가 되자 타이완은 좋은 교육 제도와 의료 서비스를 갖추고 있으며 엄격한 통치가 이뤄지는 일본의 모범적인 식민지가 됐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장제스와 마오쩌둥(Mao Zedong)이 중국의 패권을 두고 싸울 때 국민당과 공산당은 타이완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사실, 장제스와 마오쩌둥은 모두 일본으로부터 타이완의 독립을 지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다 1942년부터 1943년에 걸쳐 이들의 입장이 변하기 시작하며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이 다가오자 장제스는 타이완을 “중국에 반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도 따돌림을 당하지 않기 위해 비슷한 성명을 발표했다. 이렇게 타이완은 중국 민족주의자인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의 내러티브 경쟁에서 저당물이 됐다.

여전히 모호한 지위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 후 타이완의 공식 지위는 모호해졌다. 1949년까지 타이완은 연합군을 대신하여 중국이 점령한 것으로 간주됐다. 이후 타이완의 지위는 제2차 세계대전을 공식적으로 종결지은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에서 결정됐다. 미국 정부는 타이완을 공식적으로 “중국의 일부”로 간주하지 않았고, 일부 이의에도 불구하고 중국에 있는 장제스의 국민당이 타이완을 관리하는 것이 명백해졌다.
물론 국민당 정부는 1945년 10월 25일 광복절에 타이완이 중국에 반환됐다는 입장을 취했지만 미국 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육군 대장 등의 미국 인사들은 유엔의 감독 아래 국민 투표를 시행할 것을 추진했지만 해리 S 트루만(Harry S. Truman) 미국 대통령은 그를 경질하고 그의 조언을 따르지 않았다. 논쟁에 따르면 미국은 문제의 기간 동안 “타이완이 중국의 일부였다”는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
1949년부터 현재까지: 일국양제
명백한 것은 “타이완은 항상 중국의 일부였다”는 주장은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타이완은 항상 중국 제국의 변방에 있었다.
최근 역사만 봐도 1949년에 건국된 중국과 타이완/중화민국이 매우 다른 길을 걸은 것이 분명하다. 중국은 의심할 여지 없이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국가가 되었지만 여전히 시진핑(Xi Jinping) 중국 주석의 억압적이고 독재적인 정권에 의해 통치되고 있다.
반면 타이완은 장제스와 국민당 아래 억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정권에서 활기찬 민주주의로 탈바꿈했으며, 한때 야당이었던 민주진보당이 현재 총통과 입법부를 모두 장악하고 있다. 고유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진 타이완은 고유한 정체성을 발전시켰고,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러티브 경쟁으로 인해 실현하지 못하고 있지만 국제 사회에서 완전하고 평등한 일원으로서 맡은 바 역할을 하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폼페이오 전 장관은 그러한 내러티브에 반박하고 타이완을 독립적으로 본 것에 대한 공을 인정받아 마땅하다.
이 기사는 원래 온라인 뉴스 잡지 더 디플로매트의 2020년 12월 1일판에 게재된 기사를 포럼 형식에 맞게 편집한 것이다.